거인의 어깨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2018)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2018)

    영화 을 보고 피어난 로망이 있다. 서로 몸을 부딪히며 하는 집단 스포츠를 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성적인 목적 이외의 스킨쉽이 부족하다. 서로 살이 맞닿을 때 느낄 수 있는 유대감, 접촉으로 벌어지는 일차원적인 갈등은 사라졌다. 그러나 스포츠에서만은 이 모든 것이 격렬하게 살아 움직인다. 대부분의 집단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축구 역시 삶의 복제판이다. 단순한 룰의 스포츠 아래에서도 수많은 인간간의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축구 경력과 실력이 권위를 부여한다. 팀은 승리를 위해 경기를 플레이한다. 하지만 동시에 조화력이 높은 사람이 팀을 완성한다. 팀은 팀원을 위해 승리를 포기한다. 같은 신념을 지닌 자들이 정의를 구현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화합을 이룬다. 이런 스포츠의 세계는 흔히 남자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1979-1992)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1979-1992)

    코믹 SF라는 장르를 개척했다고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작품이 전반적으로 맥락없고, 앞뒤가 안 맞으며, 부조리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런 과학적 허무맹랑함은 Science Fiction이라는 미명으로 용인된다. 하지만 이런 황당함이 웃음을 자아낸다. 현실에 충분히 있을법한 관행들을 교묘하고 희한하게 돌려까는 통찰력과 창의력이 빛나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현대인들을 아래처럼 제 3의 외계인이 전혀 이해못할 지구인을 그리듯이 묘사하는 식이다. 이 행성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이 행성에 사는 사람들 대다수가 대부분의 시간동안 불행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수많은 해결책이 제시되었는데, 이 해결책들 대부분은 작은 녹색 종잇조각들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었다. 좀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타인의 해석(2020)

    타인의 해석(2020)

    ‘세상은 이야기로 이루어졌다’라는 책에서 짧게 언급한 문장이 있다. 인간은 거짓을 간파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타인을 의심하는 것보다 믿는 것이 생존에 큰 이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타인의 해석’은 이 한 문장에서 출발하는 수많은 인간의 실수와 오류를 다룬다. [진실 기본값 이론의 딜레마] 2007-2011년 심리학자 러바인은 실험을 기획한다. 피실험자들이 컨닝을 하게끔 시험 환경을 유도한 뒤, 시험이 끝난 후 그들에게 컨닝을 했냐고 추궁하고 그 반응을 기록한다. 이후 피실험자들의 영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구분해보라고 한다. 평균적으로 약 54%의 적중률을 보였다. 얼핏 들으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 중에 반, 거짓을 말하는 사람 중에 반을 맞춘 것처럼 들린다..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2023)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2023)

    [문과도 과학을 좋아합니다. 성적이 안 나왔을뿐.]난 고등학교 때까지 수학을 재밌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하지만 과학은 아니었다. 과학은 재밌지만 못 했다.고등학교 1학년 때 특히 물리가 재밌었던 기억이 난다. 그치만 중요한 건 뭐다? 성적이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당연하게 성적이 더 잘 나오는 문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과를 선택했다면 가지 못 했을 대학교를 갔다. 과학은 절대 불변의 진리를 모아둔 학문이다. 공식을 넣으면 답이 나오고 현상이 있으면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형이상학적인 해석을 도출해야 하는 학문과 다르다. 그런 점이 매력적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과학 교양서를 재밌게 읽었다. 성적 부담 없이 내가 모르는 분야를 아는 즐거움이 있었다. 책의 말을 빌리자면,..

    그리스인 조르바(1946)

    그리스인 조르바(1946)

    [카잔차카스가 그린 위버멘시, 조르바] 니체는 우리가 위버멘시-궁극적인 인간상-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버멘시란 무엇일까?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니체는 인간의 정신의 변신단계를 아래 세 가지로 나누었다. 첫 번째, 낙타. 낙타는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도 묵묵히 짐을 나른다. 주인에게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는 성실함과 헌신이 있다. 하지만 낙타 자신은 스스로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그 고통을 그저 견디는 노예 정신을 지닌 자들이다. 니체는 순응하는 노예적 삶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두 번째, 사자. 사자는 낙타와 반대로 모든 것에 반항한다. ..

    여름엔 북극에 갑니다(2017)

    여름엔 북극에 갑니다(2017)

    고요함 속에 분주함이 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을 것 같은 절대 침묵 속에서도, 작은 벌레들이 바닥에 붙어 꿈틀거리고 꽃잎 속에 숨어서 살고있다. 긴 침묵 속에 혼자 걷다 보면 몇년 동안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일들이 갑자기 생각나기도 한다. 즐겁고 행복했던 때도 떠오르지만, 슬프고 후회스런 기억이 더 많이 튀어나온다. 당장이라도 미안하다고 메시지를 보내거나 편지를 띄우고 싶지만, 그저 가만히 생각이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두면 어느새 기억들은 상자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242쪽) 이 책은 생태학자가 조류 연구를 위해 다른 과학자들과 북극으로 떠난 뒤 적은 여행 일지다. 문체는 담백하며, 책 전반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욕심은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그저 하루하루 북극을 탐험하며 본 것과 느낀 것을 ..

    중경삼림(1994) - 스포주의

    중경삼림(1994) - 스포주의

    네가 떠나서 내 방이 슬퍼하고 있어 중경삼림은 두 개의 다른 에피소드를 엮어서 만든 영화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 파 vs 두 번째 에피소드 파로 갈리는 듯 한데, 나는 단연코 경찰x페이를 다룬 두 번째 에피소드 파다. “실연한 짝사랑하는 사람 방을 매일 몰래 청소해주는 여자” 언뜻 들으면 소름끼친다. 장르가 공포였던가? 실제로 스토커처럼 방을 들락날락 했다기 보다는, 영화적 묘사라고 생각한다. 경찰 663이 비누와 수건을 들면서 이제 그만 극복하거나 힘내라고 말하는 건 자기 자신에게 하는 소리다. 즉, 방은 경찰 663의 감정 그 자체다. 그리고 페이는 그 감정을 하나씩, 경찰 663도 모르게 밝고 경쾌하게 바꿔준다. 어쩔 때는 물이 넘쳐 흐르듯 그녀의 감정이 그에게 쏟아진다. 그리고 그렇게 감정을 받은..

    쿵푸팬더4 (2024) - 스포주의

    쿵푸팬더4 (2024) - 스포주의

    [더빙의 매력을 알다] 쿵푸팬더 하면 성우를 맡은 잭 블랙의 찰진 연기를 빼 놓을 수 없는데, 영화를 급하게 예매하다보니 더빙으로 잘못 예매해버렸다. 평소에도 더빙/자막 하면 무조건 자막을 고르는 편이다. 원작의 말투와 대사를 느낄 수 있고, 덤으로 외국어 공부까지 하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보게 된 더빙판 쿵푸팬더에서 더빙의 매력을 알아버렸다. 대학교에서 교수님이 외국어 공부가 어느 경지에 이르면 자막을 한 글자씩 해석하는 게 아니라 통으로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우리가 원어를 읽을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막을 단어 단어로 읽지 않고 한 번에 이해한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발화와 다르다. 문장을 마치기 전까지는 이 대사가 어떻게 끝날지 관객이 예측하기 어렵다. 그리고 유머는 ..

    괴물(2024)

    괴물(2024)

    어떤 영화는 끝날때서야 전체적인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다. 일명 반전 영화라고 한다. 이 영화의 반전은 타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경종을 울린다. 관객은 괴물이라는 영화 제목에 현혹돼 보는 내내 괴물은 누구일까 찾는다. 나는 괴물은 누구냐며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을 보고 사이코패스물을 상상했다. 하지만 결국 괴물은 없다. 성장통을 겪는 두 명의 아이가 있었을 뿐이다. 영화는 가장 약한 존재인 성소수자 아이 두명을 주인공으로 어른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어른들 또한 또한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괴물같은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괴물은 아니다.아이와 학생을 사랑하는 평범한 어른일뿐이다. 하지만 사소한 혐오적 표현은 아이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아 본인을 괴물로 생각하게 한다. 세상의 약함을 조명하는..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2023)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2023)

    한국어 제목보다도 원제가 더 와닿는다. All the beauty in the world. 아름다움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미술품들 사이에서 인생의 아름다움을 찾는다. 이 책은 ‘고귀한 것과 평범한 것 모두에서 기쁨을 찾는 슬픔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생에 대한 의지와 목표를 잃던 주인공은 도피성으로 미술관 경비원으로 단순 반복적인 업무를 선택한다. 경비원은 따분하고 지루한 직업이다. 말 그대로, 머리를 쓰지 않는 단순 노동이다. 같은 맥락에서 책 ‘편의점 인간’이 떠올랐다. 살고는 싶지만 세상에서 피하고 싶은 주인공이 택할 법한 일이다. 하루가 끝난 후 86번가에서 지하철을 탄 나는 우물처럼 샘솟는 연민의 마음으로 동승자들을 둘러본다. 평범한 날이면 낯선 사람들을 힐끗 보며 그들에 관한 가장 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