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도 과학을 좋아합니다. 성적이 안 나왔을뿐.]
난 고등학교 때까지 수학을 재밌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하지만 과학은 아니었다. 과학은 재밌지만 못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특히 물리가 재밌었던 기억이 난다. 그치만 중요한 건 뭐다? 성적이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당연하게 성적이 더 잘 나오는 문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과를 선택했다면 가지 못 했을 대학교를 갔다.
과학은 절대 불변의 진리를 모아둔 학문이다. 공식을 넣으면 답이 나오고 현상이 있으면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형이상학적인 해석을 도출해야 하는 학문과 다르다. 그런 점이 매력적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과학 교양서를 재밌게 읽었다. 성적 부담 없이 내가 모르는 분야를 아는 즐거움이 있었다.
책의 말을 빌리자면, “무언가를 새로 아는 즐거움을 주거나 오래된 생각을 교정하도록 격려한 것은 과학 책이었다.”
생각해보니, 과학 교양서는 과학을 인간의 언어로 풀어낸 책이다. 딱딱한 공식만 있었다면 그렇게 재밌게 읽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과학책도 작가의 문과적 역량이 중요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처럼 말이다.
문과처럼 인간 세계에 미치는 의도를 파악하고 자신의 해석을 도출해내야 대중에게 와닿을 수 있다.
이 책은 몇십년 몇백년을 걸쳐 증명된 기초적인 과학을 분야별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리고 각 과학 분야들을 인간의 삶과 엮어 시사점을 도출해 낸다.
나는 문과적 역량을 자신과 타인에 대한 연민과 감수성이라고 생각한다.
문과적 역량에 있어 궁극에 가깝게 도달한 작가 손에서 이렇게 괜찮은 과학 교양서가 나온다.
나는 이과가 문과를 무시하는 것도 싫고, 문과가 이과를 배척하는 것도 싫다. 통섭의 대표적인 예시로 이 책을 들고 싶다.
(책을 읽으면 이과적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경제학계에 느끼는 유시민의 개인적인 울분도 느낄 수 있다.)
[1장. 뇌과학 -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대답은 분명하다. ‘나는 뇌다’. 뇌는 물질이지만 철학적 자아는 물질이 아니다. 내가 뇌일수는 없다.
그런데도 굳이 그렇게 말한 것은 뇌를 떠나서는 철학적 자아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48쪽)
인간은 신체보다 정신을 본인의 본질로 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정신과 가까운 뇌를 인간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뒤따를 철학적 고찰은 수없이 많다. 블랙미러 에피소드만 몇 개 봐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장은 뇌를 인간으로 치환하여 과감하게 설명한다.
예를 들면, 인간은 선한 존재라는 주장을 거울신경세포를 들어 생물학적으로 타당하다고 하는 식이다.
어떻게 보면 끼워맞추기 같은 주장일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고민하던 인간의 본질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신선했다.
칸트의 인식론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주관과 무관하게 사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과학적으로도 옳다. 파장 380~720 나노미터 영역의 전자기파가 물방울을 만나 굴절한 것을 보고 우리는 무지개라고 한다.
하지만 무지개는 우리의 주관적 자아가 들어간 해석이다. 따라서 무지개란 것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뇌는 편견을 가지고 왜곡된 시선으로 계속 변형하여 사물을 인식한다. 인간=뇌는 완벽하지 않다.
뇌에 깃든 우리의 자아는 단단하지 않다. 나도 예전에는 언행이 훌륭하고 일관성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랬던 사람이 달라지면 원래부터 권력과 돈을 탐하며 반칙을 저지르던 사람보다 더 미워했다.
‘지유의지’로 선택한 변화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런 사람을 특별히 미워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나빴던 사람보다는 낫다고 본다.
뇌과학을 조금 알고나니, 어떤 인간에 대해서도 무한 신뢰하거나 무한 불신하지 않게 되었다. (92-93쪽)
[2장. 생물학 -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암수가 교미해 생식 능력이 있는 자식을 낳으면 같은 종이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피부색과 외모가 어떠하든 80억 호모 사피엔스는 모두 같은 종에 속한다. (119쪽)
모든 생물는 DNA가 같은 언어로 씌어져 있다.
그리고 인간을 포한한 모든 생물의 목표는 생존이다. 우리는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존재한다.
저자는 생물학적 예시를 몇 개 들어 인간의 행동을 설명한다.
먼저,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ESS(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를 통해 간단하게 설명된다.
모두가 이득을 볼 수 있는 환경에서는 무임승차자가 큰 이득을 취하기 때문이다.
반면 개미처럼 헌신적인 생활도 가능한 이유도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하다.
개미는 여왕 개미를 통해 낳은 자매끼리의 유전 연관도가 다른 종에 비해 높기 때문이다.
생물은 보통 염색체 수가 2n개인 두배수체이다. 그런데 개미 수컷은 수정되지 않은 난자에서 나오기 때문에
염색체수가 n개인 홑배수체다. 어미 염색체 2n개의 절반만 가지고 있다.
반면 수정란에서 태어나는 암컷은 어미와 아비한테서 받은 유전자를 다 지니고 있다.
여왕개미가 수컷 한 마리와 교미해서 받은 정액을 보관해 두고 계속해서 난자를 수정한다고 하자.
이 경우 딸들은 75퍼센트의 확률로 유전자를 공유한다.
아비의 염색체는 원래 n개 뿐이어서 모든 딸이 똑같은 것을 받는다. 딸들의 유전자는 일단 절반 완벽하게 동일하다.
여왕개미의 유전자는 염색체 감수 분열을 통해 절반만 딸에게 넘어간다. 딸들이 모계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은 50%다.
절반인 아비 유전자는 모두 같고 절반인 어미 유전자는 50%의 확률로 같으니 자매 개미들의 평균 유전 연관도는 75%다.
양성생식을 하는 다른 종의 형제자매 연관도보다 50%높다. (151쪽)
[3장. 화학 - 단순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과학 교양서를 읽을때는 주로 우주학이나 물리학을 집었다. 이 장을 읽고 화학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각 원소들을 사람의 성격처럼 묘사하고 있어서 이해하기 쉽다.
탄소 원자 하나로부터 지구와 생명과 물질이 생겨났다는 점이 새삼 경이롭다.
탄소는 전자를 공유할 기회가 오면 거부하지 않지만 남의 전자를 함부로 탐하지 않는다.
원자핵과 전자가 비교적 가까이 있어서 잘 깨지지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어떤 경우에도 깨지지 않을 만큼 단단한 것은 아니다. 모든 면에서 어중간하다.
바로 그런 성격 덕분에 탄소는 생명 탄생의 주역이 되었다. (189쪽)
[5장. 물리학 -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을까? 별에서 왔자. (228쪽)
지구상에 존재하는 원자들은 모두 우주에서 왔다.
빅뱅 직후 양성자와 중성자를 비롯한 입자가 생겼고, 그 입자들이 높은 온도와 압력을 받아 주기율표 첫 주기의 수소와 헬륨이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연쇄 작용과 물리 법칙을 통해 다른 원자들이 생겨났다.
언젠가 태양의 수소가 다 떨어지면 태양또한 자체 중력으로 수축할 것이다.
그러면 지구도 같이 폭발하여 우주로 흩어질 것이다.
[6장. 수학 - 우주의 언어인가 천재들의 놀이인가]
수학이 절대적인 진리를 표시하는 언어인지, 아니면 단순한 논리적 유희인지에 대한 수학의 실재에 관한 논의는 활발하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수학은 어려운 문제를 단순하게 표현하는 지적 유희라는 의견이 우세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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