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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어깨/책

여름엔 북극에 갑니다(2017)

by 방황하는물고기 2024. 4. 23.


고요함 속에 분주함이 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을 것 같은 절대 침묵 속에서도, 작은 벌레들이 바닥에 붙어 꿈틀거리고 꽃잎 속에 숨어서 살고있다.
긴 침묵 속에 혼자 걷다 보면 몇년 동안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일들이 갑자기 생각나기도 한다. 즐겁고 행복했던 때도 떠오르지만, 슬프고 후회스런 기억이 더 많이 튀어나온다.
당장이라도 미안하다고 메시지를 보내거나 편지를 띄우고 싶지만, 그저 가만히 생각이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두면 어느새 기억들은 상자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242쪽)


이 책은 생태학자가 조류 연구를 위해 다른 과학자들과 북극으로 떠난 뒤 적은 여행 일지다.
문체는 담백하며, 책 전반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욕심은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그저 하루하루 북극을 탐험하며 본 것과 느낀 것을 적을뿐이다.

책을 읽으면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북극은 육지로 둘러싸인 얼어붙은 바다이다. 즉, 얼음 조각이다.
평균 기온이 영하 35도인 얼음 조각 위에서 사향소와, 북극토끼와, 회색늑대와, 꼬까도요의 생명력은 활기차다. 하루하루, 생명의 순환을 따라서.
조각조각난 얼음 조각 위에서도 생명은 존재한다.

호사북방오리는 호숫가에서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물에 빠진척 허우적댄다.
죽은 사향소의 시체 사이에서는 북극황새풀이 핀다.
회색 늑대는 과학자들의 쓰레기를 뒤진다.
레밍 두마리가 남긴 사과를 주워 먹는다.
모두 살기 위해 치열하다. 아니, 치열하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이다.

누군가 죽어야 누군가 산다. 이게 북극에서만 유효한 명제는 아닐 것이다. 하나의 개체 입장에서 죽음과 삶은 뚜렷한 경계로 나뉘어져있지만,
생태계의 물질 순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리 대단한 차이가 아니다. …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흙으로 내려와 북극버들의 잎에 머물렀다가 사향소의 몸으로 흡수되고 다시 회색 늑대에게 건네질 것이다. (137쪽)


이토록 치열하게, 인간은 어려워하는 생존의 삶을 해내는 자연을 어찌 경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담담한 글과 사진이 숭고함을 극대화 시킨다. 좋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