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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씀/일기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가

by 방황하는물고기 2024. 4. 12.

글쓰기 모임의 주제를 받을 때마다 생각나는 책이 있었다.

 

  • 올해 초에 세웠던 목표 중에 바뀐 것 -> 채식주의자,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 복잡하게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별 거 아닌 것에 대하여 -> 기억 안 나는 어떤 사회과학 혹은 심리학 책 (뭐라도 대충 써 넣을까 했는데 솔직하게 쓴다.)
  • 장바구니에서 못사는 아이템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본질 -> 보통 사람들의 전쟁

 

그리고 이번 주제는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가" 이다. 이 주제도 역시 결론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줄 만한 책이 떠오른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1993) 

 

한국판 표지는 김수현과 박민영이 캐스팅되는 로맨스 드라마의 원작 소설 같다.

솔직하기로 했으니까 말하면, 안 어울린다!

검색해보니 원제는 'The Course Of Love'이다. 외국판은 아래같은 표지를 가졌다.

 

흠, 한국판보다 덜 낭만적인 건 마음에 들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개인적으로 아래같은 표지가 내용에 부합하는 것 같다.

"The Course Of Love"

 

이 책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아주 객관적으로 그린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비트겐슈타인. 다양한 철학/사회적 개념들을 차용해 주인공이 타인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분석한다. 

 

이 책에 따르면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다. 사랑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랑은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의 분비 -> 수정을 거듭하는 합리화 -> 시간에 따른 감정의 둔화 -> 새로운 타인에게 호르몬이 다시 각성'하는 일련의 과정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한 사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없다는 점이다. 호르몬이 조장하는 타인에 대한 설레임과 욕구는 영원하지 않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계속 뛰면 죽는다. 생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여느 로맨스 작품에서는 비난받을 만한 이기적인 모습을 작가는 이렇게 변명한다. 구구절절 멋지게 말했지만 사랑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행위로 사람의 인성을 판단할 수 없다는 얘기다.

 사랑의 거부가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이타성과 동일시하고 거부를 잔인성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정말로 사랑을 선과 도일시하고 무관심을 악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그러면, 호르몬의 널뛰기가 끝난 이후에 상대방에게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그건 사랑이 아닌가?

 

여기서 고대 그리스인들이 정의한 사랑의 유형을 살펴보자.

 

출처:연애의 과학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다루는 건 에로스적 사랑이다. 고대 그리스에 이 책을 출판했다면 'The Course Of Love Eros'가 되었어야 독자 문의가 덜 들어왔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우리가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을 수정해야 한다. 타인을 유효기간 있이 에로스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다.  

 

나 포함 몇십억 인구가 내가 아닌 누군가를 만나 연인관계를 맺고 그걸 사랑이라고 정의할 때, 위 결론은 얼추 들어맞는 것 같다.

추가로 파생될만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닌 경우에도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가?

(2)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닌 경우에도 유효기간이 있는가? 

 

하나씩 내 의견을 짧게나마 생각해보자.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닌 경우에도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가?

현명한 그리스인들의 어휘를 살펴봤을 때, 낭만적인 황홀경의 외의 다른 사랑의 유형으로는 크게 우애적인 사랑(스토리지)와 헌신적인 사랑(아가페)이 있다. 나만의 케이스로 일반화를 해보자면, 부모님과 강아지를 우애적으로 / 또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한다. 그러므로 YES.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닌 경우에도 유효기간이 있는가? 

타인과의 관계는 주고 받음의 차이가 일정할 때 성립된다. 내가 받기를 원하면 주어야 하고, 내가 주면 상대방에게도 어느정도의 피드백을 받기를 바란다. 그 차이가 0에서 멀어질 수록 관계는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서로간의 관계에서 주고 받는 관심/애정/물질 등의 모든 총량이 비슷한 정도로 유지된다면 사랑의 유효기간은 길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NO.

 

물론 위의 법칙은 에로스적 사랑에서는 예외다. 에로스에서는 성적인 흥분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고 받음의 총량 차이가 0이 아니더라도 한 쪽이 주는 자극이 크다면 유지될 것이다. 노력과 절대적으로 비례한다고 볼 수 없다. 수많은 연애 프로에서 사랑을 구애하던 출연자들이 생각난다.